베트남 축구 열풍 '박항서 감독의 모든 것'

안녕하세요 축구리뷰어 최고씨입니다.

요즘 베트남이 축구에 미쳐있다고 합니다. 물론 베트남 선수들의 개인기량 향상도 있겠지만, 그 열풍의 중심에는 한국의 '과로디올라' 박항서 감독이 있습니다.

 

그럼 오늘은 박항서 감독의 축구선수 시절부터 - 감독 시절까지 집중 탐구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박항서_그는_누구인가

프로필

출생 : 1959년 1월 4일 (빠른 59!) 만 59세 경남 산청

국적 : 대한민국

신체 : 166cm

직업 : 전 축구선수(미드필더), 축구감독

 

경력

선수시절 

제일은행 축구단 (1981)

육군 축구단 (1981~1983)

럭키 금성 황소 (1984~1988)

 

지도자

안양LG치타스 89~96  (트레이너~ 코치)

대한민국 대표팀 94 (트레이너)

수원삼성블루윙즈 97~00 (코치)

대한민국 대표팀 00~02 (수석코치)

대한민국 U-23 대표팀 02

경남 FC 05~07 

전남 드래곤즈 07-10 

상주 상무 12-15

창원시청 축구단 17

베트남 대표팀 17~

 

#박항서 선수시절

선수시절 박항서 감독은 미드필더로 짧고 빠른 패스를 중시하는 선수였다고 합니다. 항상 전력을 다하는 근성의 선수로 '악바리' 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81년 실업팀 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하여, 선수로 데뷔 곧바로 육군축구단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84년 럭키금성으로 이적하며 프로무대에 입성합니다. 85년에는 리그 우승을 이끌며 리그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었고, 86년 주장으로 선임되어 팀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88년 은퇴를 선언합니다.

 

선수로 따지면 약 7년간의 짧은 선수생활이었습니다.

 

#박항서 코치 데뷔  

은퇴 후 친정팀인 안양치타스에서 트레이너로 선임되어 96년까지 코치와 트레이너로 활동합니다. 그리고 94년 미국월드컵 김호감독체제의 국가대표팀에서 트레이너로 경험을 쌓았으며, 이때의 연으로 수원삼성블루윙즈 창단 시 김호감독과 함께 스텝진으로 들어갑니다.

 

#박항서 히딩크와 만나다

<히딩크 감독과 박항서, 히딩크 46년생, 박항서 59년생으로 히딩크가 13살 형이다..?>

 

02년 한일월드컵전 00년 국가대표팀의 수석코치로 발탁됩니다. 당시 한국 국가대표팀은 허정무 감독이 사임한 상태였고, 그 후임으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선임됩니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시 박항서 수속코치는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훌륭하게 해냅니다. 하여 02년 결국 한국은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4강에 오르는 신화적 결과를 이뤄냅니다.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히딩크 감독이 떠나고 02년 대표팀 감독은 4강신화를 이뤄낸 박항서 수석코치에게 감독직을 제안합니다. 이때 당시 축협의 언론 플레이에 박항서 감독은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박항서 감독에게 감독직을 제안할때는 04년 아테네 올림픽까지의 감독직을 제안했으나, 정작 언론에는 02년 부산아시안 게임까지이며 이후 새로운 감독이 선임 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흘렸습니다. 또한 히딩크 감독을 고문으로 국대 벤치에 앉히게 하겠다 라는 발표와 박항서 감독의 부산아시안게임 감독직이 무보수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축협은 맹비난을 당하게 됩니다. 이에 당시 기술위원장은 박항서 감독에게 대표팀의 명예를 실추 시켰다며 엄중경고를 내렸습니다(?). 

 

부산아시안게임의 감독을 맡게된 박항서 감독은 최종성적 동메달로 성적부진을 이유로 경질되었습니다.

 

당시 부산 아시안게임 멤버로는 박지성, 이천수, 최태욱, 이동국, 김은중, 김두현, 김용대, 김동진, 이운재, 이영표로 화려한 라인업이고, 금메달만을 원했던 분위기라 박항서 감독의 경질은 자연스러웠습니다. 

 

#다시 클럽으로

경질 이후 05년 경남 FC 창단에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습니다. 그가 이끌던 경남 FC는 07년 리그 4위를 차지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07년 12월 전남 드래곤즈의 사령탑을 맡아 컵 준우승을 차지하고 09년 플레이오프 진출 최종 4위라는 성적을 기록합니다. 하지만 10년 팀부진을 이유로 사임했습니다.

 

13년 상주감독이 된 박항서 감독은 2부리그인 챌린지 리그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상주를 1부리그로 승격시켰습니다. 15년을 끝으로 박항서 감독은 상주를 떠나게 됩니다.

상주감독 시절 : 과로디올라

 

상주에서는 부대장과의 갈등을 인터뷰에서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인터뷰 내용을 보면

“4년간 세 분의 부대장을 모셨는데, 지난 두 번의 부대장들은 지도자의 의견을 존중해 줬다. 소통도 잘 이뤄졌다. 그런데 이번 부대장은 선수들을 전투병 비슷하게 만들었다. 세계 군인 선수권 대회가 있다며 선수들을 숙소가 아닌 운동장에서 쉬라고 시켰다. 시즌 중에도 아침마다 4~6㎞씩 구보를 시켰고, 리그 경기 하루 전에 (선수들을) 산에 올려 보냈다. 그러면 선수들 근육에 무리가 간다. 지난해까진 구단에 국장이 있어 부대하고 소통했는데, 올핸 그런 상황도 아니었다. 부대장이 올 때마다 정책이 바뀌었다. 선수들이 군인은 맞지만 전투병은 아니잖느냐? 개인적으로 면담을 요청해 우승하지 못하면 결과 갖고 책임진다고도 했다. (그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겠지만, (상무의) 30개 종목 특성이 다 다른 거 아니겠나? 축구 감독 처지에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작년까진 어느 정도 감독의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선수 선발에 권한이 없었다. 세계 어딜 가도 그런 기준은 없다. 일정 부분에선 감독이 선수를 뽑을 수 있는 재량권을 줘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선수 선발 부정) 예방 차원이라지만, 그러면 (감독을) 처벌하면 되는 거다. 올해 유독 문제가 많았다”

라고 말해 군의 간섭이 심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알렸습니다.

 

박항서 창원시청 감독 시절

 

이후 17년 창원시청 감독을 맡게 되지만, 제대로 된 팀 전력을 구성하지 못하게 됩니다. 6월 내셔널 선수권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으나, 하반기 결국 선수보강 실패의 한계를 들어내며 7위로 급락하였습니다.

 

그리고 17년 베트남으로 떠납니다.

 

 

#박항서 베트남으로 

 


"나를 선택해준 베트남 축구에 내가 가진 축구 인생의 모든 지식과 철학 그리고 열정을 쏟아 붓겠다"


 

17년 9월 베트남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이후 10년간 이기지 못했던 태국원정에서 태국을 격파하며 그 쌀딩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AFC U-23 축구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 호주 시리아와 같은 조에 편성되어 약체로 평가 되었지만 대한민국과 대등한 경기력, 호주를 격파, 시리아와 비기며 조 2위로 8강에 진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우승후보 이라크를 상대로 연장 승부차기 혈투끝에 승리, 동남아 국가중 유일한 4강팀 진출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카타르와의 준결승전에서도 연장 승부차기끝에 승리, 베트남 축구 역사상 첫 AFC주관대회 결승진출이라는 이뤘습니다. 

 

준결승이 끝난 시점 베트남 정부는 선수단 전원에게 훈장을 내리기로 결정했으며, 박항서 감독은 3급훈장을 받게됩니다. 

 

박항서 매직에 열광하는 사람들

 

 아쉽게 결승전에서는 연장 후반 종료 1분을 남기고 실점하여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베트남은 이미 박항서 매직에 환호하며 준우승에 열광했습니다. 귀국 이후 카퍼레이드와 행사의 인파들을 보고 박항서 감독은 많은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비나폰 4개국 대회에서 팔레스타인에 2-1, 오만에 1-0, 우즈베키스탄에 1-1로 비기며 우승했습니다. 

 

아시안게임에서는 파키스탄에 3-0, 네팔에 2-0으로 승리하여 16강을 확정지었고, 일본을 1:0으로 무찌르며 신흥강자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베트남은 AFC U-23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멤버가 상당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강력한 우승후보 중 하나라고 합니다. 

 

#박항서 매직의 비밀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에서 시작한 것은 베트남의 체계를 잡는것 이었다고 합니다. 베트남 감독으로 부임당시 면접에서 박항서 감독은 자신의 작은 키를 어필하며 기동력있고 빠르고 재미있는 축구를 만들어가겠다고 어필했다고 전해집니다.

 

- 하나의 팀으로 만들기 위한 규칙들

당시 베트남 축구팀에는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었다고 합니다. 젊은 선수들이라 그랬겠죠? 다들 밥먹을때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선수간 서먹함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선수들은 경기 시작전에도 휴대폰으로 외부인과 통화하고 말없이 흩어지곤 하며 한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축구는 팀이란 우리가 우선이다 라는 철학을 가지고 규칙들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 했습니다. 매우 단순한 것들 이었는데요, 식당에 휴대폰 가져오지 않기, 버스에서 통화하지 않기, 식사시간에 늦지 않기 등 사소하지만 팀이라면 마땅히 해야할 것들을 규칙으로 만들어 몸에 배도록 하였습니다.

 

- 이해와 배려

베트남에서 선수단을 이끌때는 박항서 감독은 한국음식을 먹지 않고, 선수들 식단에 맞춰 식사를 했습니다. 그나라의 문화에 젖어들기 위해 노력했고, 행사를 통해 격려금이 나오면 모든 팀 구성원들이 금액을 나눠 갖으며 원팀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자존심이 강하고 개인주의적인 특성을 지닌 베트남 선수들을 위해 잘못을 지적하거나 혼을 낼때는 따로 불러 잘못된점을 지적하고 격려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 전술의 변화

당시 베트남은 포백 전술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박항서 코치의 눈에 이는 베트남선수들의 장점을 살리지 못한다고 판단 하였습니다. 그래서 들고 나온 3백전술로 수비를 탄탄하게 하고 민첩한 측면 미드필더와 볼키핑이 좋은 미드필더를 중앙에 두텁게 두어 기동성을 강조한 축구를 구사했습니다.

 

 

#박항서의 별명

쌀딩크, 과로디올라, 스리핑-원, 쿨쿨롭, Pho체티노, 히띵크, Zzzi단, 졸리뉴, 베딩크 등등

 

#마치며

오늘은 박항서 감독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한국축구계에서 쫓겨나듯 베트남으로 가게된 박항서 감독은 한국축구를 원망하진 않는다고 합니다.

 

베트남 국민에게 받은 사랑만큼 돌려 주기 위해 노력하고 이번 감독직이 축구인생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하는 박항서 감독, 한국인 감독이 외국에서 선전하는 모습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슬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박항서 감독의 선전을 기원합니다.

 

끗-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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