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반 고흐의 노랑'

안녕하세요 회화 리뷰어 최고씨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그림은

빈 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입니다.


<이 해바라기 아니니까 래원이형은 나가있어!>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그림 해바라기는

고흐가 인상파 화가들과 

만나 새로운 화법에 눈을 뜨게 되며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고흐는 총 11개의 해바라기 그림을 그렸고

아래의 해바라기 그림이

가장 걸작으로 평가 받습니다.


<1888,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위 그림은 1888년

그린 4개의 해바라기 그림 중 마지막

작품인데요, 이때부터 고흐는

사물과 배경의 색을 같은 계열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고흐의 해바라기에서는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해바라기의

모습에서 역동과 강한 느낌 그리고

연약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이 해바라기 그림은

따듯한 태양 빛이 주는 긍정적인

에너지처럼  

희망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흐의 이 그림은

'빛을 배경으로 한 빛'이라고 불리는

빛의 영광을 표현한 그림이라고도

불립니다.


고흐의 해바라기에는 삶과 죽음이 

담겨있습니다.

막 꽃 피우려는 해바라기 부터

시들어 있는 해바라기와

이제는 꽃잎이 없는 해바라기 까지

생명의 순환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림자가 없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빛이 주는 

신성함을 표현하면서도


노랑의 대비로 꽃에 

입체감과 부피를 부여하여

그림에 신비함을 더했습니다.

 

 고흐의 노랑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고흐가 태어나기전

출생하자마자 세상을 떠나게된

동명의 형이 있었습니다.


 형의 무덤에서

고흐는 해바라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해바라기는 그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꽃이 되었습니다.


‘고흐가 그림뿐 아니라 항상

마음속에서도 꿈꾸었던 색’


노란색은 해바라기로 

반고흐에게

상징적인 색이 됩니다.


태양의 색 노랑은

희망과 정열을 뜻하기도 하지만

불안과 모순 불안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반 고흐의 노란색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다가오나요?


끗-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 공감 ♥ 꾹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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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아이 '폴 고갱이 그린 남태평양에서 태어난 예수'

안녕하세요 회화리뷰어 최고씨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그림은

폴 고갱의 신의아이 입니다.


19세기 남태평양에서

한 예술가의 손에 의해

유일무이한

독특한

예수상이 만들어집니다.


 <‘신의 아이’, 테 타마리 노 아투아(Te Tamari No Atua), 캔버스에 유채, 92*128㎝, 1896년, 뮌헨>


위 그림에서 성모는 

백인이 아닙니다.


고갱의 성모마리아의 모델은

그의  애인이었다고 합니다.


고갱은 예수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하게 생각하는

아기 예수의 탄생장면을 떠올린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그림을 떠올리게 됩니다.

세명의 현자들과 

천사 그리고 

빛나는 하얀 아기 하얀 성모


하지만 고갱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타이티에서 탄생한 이 그림을 보면

성모와 아이의 머리에서 후광이 비추는걸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탄생을 축복하기 위해

내려온 타이티인 형상의 천사가 보입니다.


예수의 탄생을 나타내는 작품입니다.


고갱은 그림을 지켜보는 관객이

동방박사가 된 것처럼 


예수의 탄생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고 합니다. 


성모는 금색 이불위에 누워있는데

마치 기존의 예수의 탄생화에 

많이 그려져 있는 황금빛 짚단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뒤에 동물을 보면 반은

마굿간 반은 침실처럼 보입니다.


이 그림은 다른 문화와 종교가

뒤섞여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폴 고갱 



자라면서 신앙심이 깊은 기숙학교에

머물던 고갱은 종교적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반항적인 성격이었던 

고갱은 전세계를 여행했고,

엄청난 돈을 벌기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안정적으로 지냈다고 합니다.


그림과 조각을 시작하면서 부터

자신이 어린시절 부터 꿈꾸던 이국적인것을

그리는 작품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파리에서 생활하던 고갱은

순수한것을 열망하고 있었고 

마침 당시 완공된 에펠탑 박람회에서 

타히티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에게 매료된 고갱은

타히티섬으로 가게 됩니다. 


원시의 순수를 찾기위해

타히티로 간 고갱은

그곳의 개발된 모습에 

굉장히 실망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도시를 저버리고 오지로

들어가 생활하기에 이릅니다. 


이곳에서 타히티의 원시종교의

흔적들과 마주하여 '신의아들'을

제작하는데 큰 영감을 주게 됩니다. 


당시 고갱의 시도는

기존 사회와 종교적 가치에 대한

굉장한 도전이었습니다.


유럽인들에게 예수의 탄생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성스러운 것이었지만

고갱은 출산을 하는

하나의 통속적인 장면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고갱은 기술적으로도

이 작품에 굉장한 애를 쓰게 됩니다.


이 그림을 그린 캔버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제작된 것으로 고갱은

타히티의  분위기를 담고자 거친 표면의 캔버스를

주문하여 제작합니다. 

 

이 그림은 마네의 올랭피아를

타히티 버전으로 재 해석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신의 아들은 어떻게 유명해졌는가

 

고갱의 그림은 그가 살아 생전에 

빛을 보진 못했습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폰 츄디라는 예술역사학자에게 발견되어

독일 국립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황제 빌헬름2세는

현대예술을 좋아하진 않았고 

그 그림을 반대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폰 츄디는 

뮌휀박물관장으로 취임하여 

자신의 사비로 신의아들을 구매합니다.


그리고 고갱은 자신의 생각대로

예술의 천재로 불리게 됩니다.


세상에 나온 폴고갱의 그림은

1937년 독일 나치정부에 의해 

몰수 당합니다.


검은 마리아를 그린 이 그림은

나치정부의 주요 표적이었고 

이 그림은 나치의 예술품을 모아둔

비밀장소에 봉인됩니다.


당시 전쟁으로 수많은 박물관이

폭격을 당해 많은 미술품이 손실 되었지만

고갱의 이 그림은 아이러니하게

나치의 유일하게 폭격당하지 않은 건물에서

멀쩡하게 돌아오게 됩니다. 


이국적이고 문화 - 종교적 차이가

만들어낸 걸작

'신의아이'는 꼭 아이 예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끗-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과 공감은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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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Last supper

안녕하세요 회화 리뷰어 최고씨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입니다.


<최후의 만찬, 1495-1498, 밀라노>


이 그림은 기하학적인 형태와 수학적

논리정연함을 갖춘 하나의 마스터 피스입니다.


위대한 걸작이라고 불리는 그림 중

꼭 들어가는 이 그림에는 많은 사연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 그림은

무려! 벽!화!입니다.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에 그려진

이 벽화는 몇 안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완성작이자, 가장 훼손이 심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가로 9.1미터, 세로 4.5미터의 거대한 규모의

벽화는 원근법을 이용한

최초의 와이드 스크린의 예술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지금의 벽화는 복원된 벽화입니다.

벽화는 배반의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를 폭행한 자의 귀를 자르는 베드로>


<예수를 팔아 넘기고 은화를 받은 유다>


해당 벽화의 자리는 본래 

수도원의 식당자리의 벽이었습니다.


하여 다빈치는 수도원의 테이블 배치에 맞춰

최후의 만찬의 인물들을 배치했다고 합니다. 


기존의 만찬 그림에서

유다는 별도의 테이블에 떨어져 있지만

다빈치는 무리에 포함시키므로서,

유다의 배신보다 

사도간의 유대관계를 강조했습니다.


전통적인 그림의 디자인을 변화시킨 다빈치는 

 그림의 기법도 바꿉니다.


 벽토의 벽을 긁어내

그림을 그리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냅니다.


두껍게 회반죽을 바르고 

벽이 마르기전 축축한 상태에서

그림을 그립니다.


벽화를 그리는 기법 중 하나인

프레스코 기법은 

벽이 축축한 상태에서 그리는 기법으로

수세기동안 유행하던 방식입니다. 


하지만 다빈치는 이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지 않고 회반죽 벽에 

칼슘과 마그네슘, 연백의 안료를 활용해 

2중으로 벽을 칠하고

벽이 마르길 기다렸습니다. 


기존의 방식대로 그림을 그린다면

벽이 마르기 전에 그려야 하기 때문에 

그림을 천천히 생각하며 그리길 좋아했던

다빈치는 새로운 방식을 택하게 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하루종일 그림만 그리기도, 

또는 몇일동안 머고자기만 하기도 

몇 일간 그림만 바라보기도 하며 

굉장하게 공을 들여가며 3년에

걸쳐 작업을 완성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현재의 그림이 

레오나르도의 다른 작품들을 고려해 봤을때

지금 보다 훨씬 생동감 넘치고 

입체적인 그림이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최후의 만찬> 벽화는

식당을 훨씬 더 넓게 만든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고 

그리고 수도자들이 최후의 만찬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림의 모서리를 보면 걸려있는 줄무늬와 

벽걸이 융단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하여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수도자들은

 실제로 최후의 만찬을 보고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위 이미지 처럼

그리고 최후의만찬 예수의 시선에서

위를 바라 봤을때 

맞은편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최후의 만찬 맞은편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벽화>


최후의 만찬의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아는 듯 

눈을 내리깔고 슬픈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붉은 셔츠와 푸른외투를

 그리고 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사도 요한은

예수와 반대인 푸른 셔츠와 붉은 외투를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심많은 사도 토마스(도마)는

손가락을 들어 예수의 부활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유다는 12사도중 유일하게 

빛을 받지 못해

그늘진 얼굴을 가진 유일한 얼굴입니다.


이 대단한 작품은

단순히 예수와 사도들이 빵과 와인을

나누어 먹는 장면만을 그린게 아닌

예수가 배신당할 것을 예고하면서

그 사건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을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성서 한권을 한점의 그림에

전부 표현해낸  이 위대한 그림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부식하고 있었습니다.




벽화가 그려진 벽 뒤에서는 

요리로 인한 증기와

벽화 아래에 흐르는 지하수가

통풍이 안되는

최후의 만착이 그려진 벽에 

영향을 주며 그림을 

부식시키고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복원 분야의 독보적인

전문가가 덧칠을 일일이 벗겨내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만들어낸

오리지널부분만 복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일반 관광객을 대상으로 15분 정도만

관람할 수 있습니다.


댓글()
  1. 반긱스텔루니 2018.11.22 17: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빈치코드 영화 다시보고싶네용

    • Favicon of https://all-that-review.tistory.com BlogIcon 발칙한 최고씨 2018.11.22 17: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설(영화) 다빈치 코드에서 예수의 오른쪽 옆에 앉아있는 사도 요한을 예수와 결혼한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묘사하여 일반인들에게 큰 오해를 불러왔습니다.

      실제로는 사도요한이 맞습니다.

도시위에서 '샤갈의 행복'

안녕하세요 회화리뷰어 최고씨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그림은 샤갈의 도시위에서 입니다.




러시아인 마르크 샤갈은 서유럽, 파리, 뉴욕을 거쳐 다시 러시아를 거치며 예술활동을 지속해 나갑니다. 그래서 일까요? 샤갈의 화풍은 딱히 어떤 유파에 맞춰 부르기가 애매합니다. 아방가르드 야수파, 큐비즘, 오르피즘, 초현실주의를 아우르는 그의 그림에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각자가 샤갈처럼 chagall하기를 바랍시다"

-마야코프스키-



#도시위에서

오늘 소개할 도시위에서는 샤갈이 그의 뮤즈로 잘 알려진 벨라와의 신혼생활 중 나온 작품입니다. 


<1914-1918, 모스크바 트레타코프 갤러리, 도시 위에서>


그 당시 샤갈의 대작들이 나오는데요, 바로 아래 그림 <산책>과 <와인잔을 든 두사람의 초상화> 입니다.


<산책>


<와인잔을 든 두사람의 초상화>


이 당시 샤갈의 그림은 중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부웅 떠있고, 지면을 밟고 있는 사람도 곧 날아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중력의 무시, 무중력의 표현은 신혼부부의 행복감을 나타냅니다. 


샤갈은 아방가르드적 경향의 작품에서 우세하게 나타났던 상징표현을 단순화시켜 몽상적이지만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직접적인 메세지를 주고자 했습니다. 


"나는 렘브란트가 나를 좋아한다고 확신한다." 

-샤갈-


그림 아래쪽 당시 샤갈의 고향 러시아의 비테프스크는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전경이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고, 저 멀리 있는 경치는 평면을 띄고 있어 푹 들어간 것처럼 보이고 앞쪽에 배치된 구조물들은 입체감을 잘 표현하여 날고 있는 연인들이 좀더 두드러져 보이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슬프고도 즐거운 나의 도시여!"

-회고록에서 베테프스크를 떠올리며-


샤갈은 집과, 지붕의 질량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벨라와 자신의 옷에도 이런 같은 느낌의 질량감을 부여 한것으로 보입니다.


지면은 따듯한 색조가 주조를 이루는 반면 하늘을 나는 두 연인은 꿈을 상징하는 차가운 색조의 초록색과 푸른색을 입고 있습니다.  


<벨라와 샤갈>


사실 도시위에서는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오늘 소개한 트레타코프 갤러리의 그림은 좀더 구조화 되어있고 금속성을 띄고 있습니다. 이는 큐비즘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 좀 더 남아 있을때 그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도시위에서는 베엘레르 화랑에 보관중이며 그 그림에는 선도 부드러워지고, 질감도 더 있어보인다고 합니다. 그림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찾지 못했습니다.(업뎃예정)



20세기 최고의 화가, 색채의 마술사 샤갈

벨라와의 행복한 한 때를 기록한 샤갈의 그림에서 그의 행복이 느껴지시나요? 



끗-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댓글과 공감은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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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와 오렌지 '폴 세잔이 표현한 물체의 본질'

안녕하세요 회화리뷰어 최고씨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그림은 폴 세잔의 정물화(사과) 입니다.


 세잔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로,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야수주의와 입체주의 선구자들을 세잔을 찬미합니다. 그리고 20세기 현대미술의 시작에 세잔이 큰 공헌을 했다고 말합니다. 


 세잔은 색채의 변조, 시점의 분할, 고전적 원근법의 탈피를 통해 과거의 통념들을 깨부수고, 현대 미술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여겨집니다.


"사과 하나로 세상을 놀라게 하고싶소"



사과는 세잔에게 화가로써 전성기를 주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사과가 아닌 세잔의 정물화가 전성기를 주었지만, 수많은 정물화 중에서도 사과는 그의 그림에 특히 많이 등장합니다.



마티스는 세잔을 회화의 신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피카소는 세잔의 위작을 팔려고 하는 상인에게 호통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세잔을 모르는 줄 아시오? 세잔은 나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스승이란 말이오! 내가 그의 그림들을 바라보기만 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오, 난 그것들을 연구하느라 몇년을 보냈소" 


 브라크는 "마침내 세잔은 회화에서 숙련된 솜씨에 대한 견해를 뒤엎었습니다. 혁명입니다. 세잔을 가장 위대한 화가 대열에 올려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라며 세잔을 칭송했습니다. 


 이렇게 야수주의, 입체파 화가들의 칭송을 받는 세잔의 정물화.  그 대표적인 모델이 되었던 세잔의 사과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사과

 사과가 세잔의 작품에 첫 등장하게 된 것은 신화를 소재로한 그림에서 입니다. 이 그림에서 목동이 요정에게 사과를 바치는데, 세잔의 회화에서 사과의 위치는 하나의 일화로 쓰이는 소재는 아닙니다.


 세잔은 그림을 시작하면서 일찍이 자신이 상징이나 도덕을 형상화하는 일반적인 화가로 여겨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사실주의적인 표현기법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여 그의 정물화에는 묘하게 이질감이 있으면서도 실제로 본듯적 있는듯한 착각을 주며 그림속 사물에 영혼을 불어넣은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실제로 세잔은 그림 한 점을 그리는데 굉장히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하나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백번의 작업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잘 썩는 복숭아, 살구보다 사과, 오렌지, 레몬등 겉이 단단하고 잘 상하지 않는 과일을 선호 했다고 전해집니다.




#사과와 오렌지

 그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사과와 오렌지는 흡사 산사태라도 벌어진듯, 무질서하게 식탁보와 오렌지, 사과가 널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일과 다른 오브제들이 얽히고 섥혀있는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불안함과 익숙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과와 오렌지, 1895-1900, 파리 오르세 미술관>


 매끈한 사과와 우둘투둘한 오렌지, 그리고 새하얀천 화려한 식탁보, 접시와 술단지 등 수많은 오브제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기도 하면서 이질적입니다. 


 따듯함과 차가움, 균형과 추락, 독특한 원근법, 비어있음과 차있음, 어두움과 밝음을 골고르 작품안에 담아냈습니다. 


 세잔은 서있는 정물화에서 역동적이고 전체적인 시점을 형상화하여 입체주의 회화의 대담함을 그림에서 시작했습니다. 


 소실점으로 향하는 선은 여러개로, 각각 직각으로 교차합니다. 이 선들은 보는 시점에 따라 다르게 입체감을 주었으며, 무너져 있는 과일더미의 불안정함과 테이블, 그리고 식탁보와 흰천을 활용하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을 택해, 그림 전체에서 느껴지는 균형을 잃게 했습니다. 

 

기교를 부리지 않은 세잔의 사과는 세잔의 감수성과 감각을 잘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화가의 전성기에 정물화를 선택한 세잔은 단순한 시각, 현상적 사실에서 다시 근본적인 물체의 본질, 내적인 생명력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세잔의 시각

세잔은 시각이 순수하길 바랬습니다. 기존의 것을 탈피하고, 때묻지 않은 아이의 눈처럼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던 세잔은 유채색의 형태로 소재를 지각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전통적인 회화 기법에서 탈피하기 시작했으며 감각적인 부분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여 전통적인 시각에서 탈피하기 위해 기존의 회화가 가지고 있던 원근법 공식 (균일한 공간, 하나의 시점, 중앙의 수평선 등)을 버렸습니다. 

그의 말년 정물화에서는 비례의 파괴, 공간의 평면화, 근경과 원경사이를 넘나드는 사물의 표현으로 시선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사물을 묘사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세잔의 그림을 보게 되면 알 수 없는 불안정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마치며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는 세잔의 호언장담은 성공해습니다. 그가 작품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도 전부터 세잔의 화풍은 미술계에서 볼 수 없었던 것 이었으며, 그의 혁명적인 그림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세잔의 나이 60세가 넘어서야 시대가 그의 작품을 인정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날의 상처 때문인지 세잔은 평론가나 기자들의 칭찬과 비난을 의도적으로 멀리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세간의 평에 자신의 그림이 휘둘리지 않기 위해 단 하나의 신념만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가장 훌륭한 판단 기준은 안목이다. 안목 있는 이는 드물다. 미술은 극히 제한된 사람에게만 호소하는 예술이다."

오늘은 폴 세잔의 사과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만약 세잔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고전적인 정형화된 그림만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끗-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댓글과 공감은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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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지속 '살바도르 달리의 시간'

안녕하세요 회화리뷰어 최고씨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그림은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입니다.


 <살바도르달리, 기억의 지속, 1931, 뉴욕현대미술관>


살바도르 달리를 모르시는 분들도 이 그림은 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그림을 모르신다면 살바도르 달리의 최고 유명작품인 아래 그림은 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춥파춥스>


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탕 츄파춥스의 로고를 살바도르 달리가 그렸습니다.

오늘은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렉서스 광고에 사용된 기억의 지속>



#실바도르 달리

 영감을 꿈에서 얻었다고 하는 달리는 악몽과 근심을 공포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달리는 초현실주의를 이끌던 가장 진취적인 작가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에게 꿈과 환상은 더 표현하기 쉬운 현실적인 것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당시 초현실주의는 성직자들을 비판하고, 종교와 교회를 반대했습니다.


"세상은 나를 우러러 볼 것이다. 어쩌면 나는 경멸당하고 오해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위대한 천재가 될 것이고, 그것만은 확실하다."


달리는 초기, 작품활동을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피카소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을 보면 피카소의 화풍이 노골적으로 들어나 있기도 합니다. 프랑스에서 달리가 만난건 피카소만이 아닙니다. 그는 당시 프로이드의 이론에 심취하여 그의 책을 탐독하고 작품에 녹여 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계단이 그런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에 의하면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은 성행위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라고 합니다.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독재자인 스페인의 프랑코가 집권하자, 많은 예술가들은 비판했습니다. 달리도 전쟁을 피해 미국에서 건너오고자 했으나, 프랑코 때문에 로마로 가톨릭 교회로 가 작품활동을 한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후에 달리는 프랑코의 독재를 지지하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기억의 지속 




달리의 그림은 오로지 상상력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달리는 뛰어난 관찰자로 자연의 풍경이나 일상의 것들의 찰나의 순간을 관찰하는 것을 즐겨 했다고 합니다.


<기억의 지속 상단 암석은, 달리의 고향 크레우스의 곶에 위치한 지형>


 벌판에 드리운, 그림자는 스페인의 파니산의 그림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페인 파니산의 그림자>

배경은 한적한 바다가 황금빛 절벽에 붙어 있습니다. 달리는 넓은 배경을 순식간에 그린 뒤 무엇을 그릴지 고민합니다. 


한동안 고민하던 달리는 그리는것을 포기하고 작업실을 빠져나려던 찰나, 불현듯 어떤 형상이 떠올랐고, 순식간에 작품을 완성 시켰다고 합니다. 


그 형상은 까망베르 치즈가 태양의 열기에 녹아 흐르는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치즈를 시계에 비유하여, 녹아내리는 시계를 표현합니다.


<녹아 흘러내리는 까망베르 치즈>


이 시계의 표현은 당시 달리의 편집증적인 성격을 잘 표현해주는 작업 특성 중 하나입니다. 



#부드러운 것과 딱딱한 것

그는 딱딱한 것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에 집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달리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것은 달리가 부드럽게 표현한 것들은 자양분이 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달리의 그림에 부드럽게 표현된 시간은 달리에게는 소화될 수 있는 자양분이라고 생각된 것 같습니다. 


시계들은 나뭇가지에, 상자에,  그리고 조개껍질 처럼 보이는 이상한 물체 위에 널려 녹고있습니다.

 

대놓고 시간을 표현한 달리의 시계는 여기저기 걸려있는데 가장 위 시계 올리브나무가지에 걸려있는 시계는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 냅니다.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나무가 죽어있고, 거기에 힘없이 늘어진 시간은 평화가 죽어있던 시간을 표현하는 듯 합니다. 


뒤로보이는 평평한 층계와 상자는 계단을 표현합니다. 달리의 작품은 프로이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프로이드는 꿈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을 성행위의 표현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달리는 이 무의식의 세계를 작품에 넣기 위해 작품에 계단을 주요한 장치로 활요합니다. 


#벌레공포증

두번째 상자에 걸려있는 시계에는 파리가 있습니다. 지독하게 벌레를 싫어했던 달리는 벌레를 항상 죽음, 부패와 공포, 악몽등을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실제로 달리의 작품에 개미와 메뚜기 파리 등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런 이미지들은 달리의 공포를 표현했다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유일하게 정상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시계에는 이미 개미들이 너무 달라붙어 어찌하지 못하는 소화할 수 없는 무언가의 시간을 이야기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조개인줄 알았던 형상은 달리 스스로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광활한 벌판에 누워 시간에 눌려있는 달리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며

달리는 이 작품을 통해 초현실주의는 달리가 선두다. 라고 세간에 알리게 된 작품입니다. 


작품 전반에 현실에 존재하지만 정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모아놓음으로써,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한 풍경을 만들어 냅니다. 


처음 보면 이게 뭐야 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 그의 작품은 감성이라기보다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계획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회화는 보는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 그림에서 무엇을 느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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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구스타프 클림트의 사랑'

안녕하세요, 미술리뷰어 최고씨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작품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입니다. 제가 회화에 관심 갖게된 이유이자 첫 입문 작품입니다. 


<키스, 1907>


엄청난 매력을 가진 이 작품은 사랑의 정점을 향해가는 두 연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두 연인 주변으로는 빈 공간에 별빛이 가득한 몽환적이고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분위기가 감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두 연인은 마치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이 찰나에 최대한 빠져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구스타프 크림트

이 사랑스러운 어쩌면 에로틱한 그림은 오스트리아의 작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입니다. 클림트는 유독 여자와 고양이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왕성한 성 생활을 즐긴 것으로 유명했고 그의 작품 여러 곳에서도 그 에로틱한 성향이 잘 들어납니다. 혹자는 키스에서도 연인의 아웃라인이 음경의 형상을 띄고 있다는 해석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평생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클림트, 그의 실제 작품의 의도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나는 말하거나 쓰는데 재능이 없다. 특히 나 자신에 대해서나, 나의 작품을 이야기할때 더욱 그렇다. "


"누구든, 나를 알고 싶다면 내 작품을 들여다 봐라, 그리고 그 안에서 나와 내 작품을 이해해 달라" 


클림트가 키스를 그렸을 때는 이미 클림트는 성공한 화가였습니다. 당시의 오스트리아 빈은 위선속에서 문란한 성생활, 가난이 지배하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런 도시의 겉 모습은 성공하고 안정적인 사회로 보여지는 것이 많은 예술가들에게 비판이 되곤 했습니다. 


당시 빈은 인간의 성생활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룰 정도로 성적 관심이 높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빈에서 성과 에로티시즘을 어우른 클림트의 그림은 당시의 빈을 대표했다고 합니다. 키스도 그중 하나 였습니다. 그는 작업실에서 아무것도 입지 않고 푸른색 로브만 하나 걸친채로 벌거벗은 아름다운 여성들을 모델로, 하녀로 부리며 작업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특정한 연인과 가정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아마도 피터팬증후군이 아닐까 하고 후대의 사람들은 평가합니다. 그에게는 법적으로 3명의 자식이 있었으며 그가 사망하자 14명의 연인이 친자확인 소송을 걸었다고 합니다. (?) 그중 4명이 승소했습니다. 


클림트의 외설적이고, 선정적인 그림들은 초기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의 그림은 일반 대중을 설득하는데 실패했고 한때는 외설작품으로 취급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빈에서 분리주의 운동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공적 예술의 관습에 발목잡힌 많은 예술가들이 그의 운동에 동참했고, 아르누보 양식을 유행시켰습니다. 



#가장 널리 상품화된 예술작품

키스는 세계에서 가장 상품화된 작품입니다. 다른 모든 그림들의 모조품과 상품화된 이미지를 합쳐도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정도로 우리에게 친근한 그림입니다. 


제가 가장 최초로 키스를 본건 명함케이스였고, 가장 마지막에 본 건 두통약의 상자 디자인에서 였습니다. 그 밖에도 블라인드, 쿠션커버, 침대커버, 벽지, 애니메이션, 웹툰, 영화 등 등 등 온갖 화려하고 감각적인 예술이 필요할 때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은 쓰였습니다. 



#키스

아름답고 신비한 이 그림은 절벽 끝을 배경으로, 순금으로 둘러쌓인 화려한 면포를 입은 남자가 강인해 보이는 손으로 여성의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여 키스를 시도하려 하고 있습니다. 넓고 비어있는 배경에는 금빛만이 존재합니다. 두 연인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는듯 분위기에서 그들의 포옹으로 둘만의 세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절벽의 꽃들은 그들의 사랑에 감흥이라도 한듯 생기있게 피어나고 있고, 두 연인의 의상 또한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늬가 수 놓아져 있습니다. 


키스를 실제로 본 사람들은 그림이 가지고 있는 온화하고 사랑스럽고 다정한 분위기에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라고 입을모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많은 평론가와 작가는 클림트의 '키스'에 클림트가 믿고있는 로맨스의 결정체가 담겨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림에서 성스러움과 지고지순한 무언가를 느낀다고 이야기 합니다. 


클림트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후대의 평론가들은 그 그림이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바로 두 연인의 형상이 발기된 음경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과, 두 연인의 키스를 묘사한 것이 아닌 그 이상의 관계를 맺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키스의 황금

키스에는 그의 독창적인 기법인 황금을 사용하는 기법이 절정을 이룬 작품입니다. 그림에 금속을 접목시키는 것은 이탈리아 여행에서 산비탈레 교회의 비잔틴 황금 모자이크를 보고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곳에 표현된 천국은 황금을 사용한 모자이크 기법으로 그려져 있있고, 그것은 키스에 그대로 사용되며, 세속적 이미지인 남녀의 키스에 천국의 황금색을 가져와 세속의 천국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그림에서 모자이크로 표현할 수 없는 원근법 때문에, 황금은 빛나는 요소로만 사용되었습니다. 


키스에서는 작품 전체에 황금이 고루 사용되었으며, 남녀의 의상, 꽃의 잎, 배경의 몽환적인 분위기에 황금이 쓰였습니다.


특히 배경의 금박은 아주 얇은 금방으로 그림위에 발라 금박이 얼룩처럼 표현되어 몽환적분위기를 한껏 뽐냅니다. 거기에 그림 곳곳에 두꺼운 반죽을 사용하여, 금을 3차원적인 느낌을 갖도록 표현합니다. 그림에 금박을 하는 것은 굉장히 고도의 작업으로, 귀금속 세공업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을 살펴보면 남성의 옷의 직사각형 무늬는 남성성을, 여성의 옷 무늬 둥근 원은 여성성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를 보면 그 둘 사이는 미묘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하나됨을 표현합니다. 


#마치며

많은 제품과 모니터 속에서만 봐왔던 이 그림은 예술작품들에 관심을 갖게 해준 특별한 의미의 그림입니다. 언젠가 국내에 그림이 온다면, 아니면 오스트리아 빈에 방문한다면 꼭 봐야할 작품입니다.


클림트의 작품은 09년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를 개최한적 있고, 그 이후로는 정보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미디어 아트전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미디어 아트는 실제 회화를 보는 감동을 주진 못합니다. 


오늘 포스팅은  근대미술사의 역사적 변환점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만들어간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더욱 아름다운 그림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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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살펴본 '서양 미술사'

안녕하세요 미술리뷰어 최고씨입니다. 

오늘 리뷰는 서양미술사를 살짝 다뤄볼까 합니다. 


평소 서양미술에 관심이 있으나 본격적으로 공부하긴 싫고, 좋아하는 작가의 영역을 조금조금 늘려가며, 모네, 마네, 고흐를 시작으로, 클림트, 램블란트, 르네 마그리그를 거쳐 달리,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품 하나하나를 소개하는 포스팅을 해볼까 하다, 스스로 부족한 공부도 해볼 겸 전체적으로 서양 미술사에 대해 이야기 해보면 좋을 것 같아, 간략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서양 미술은 다양한 그림들과 함께 세계 역사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장치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다룰 서양미술사 포스팅에서는 소개하는 그림들은 평소 예술작품에 전혀 관심이 없는 모르는 사람들도 어디선가 한번쯤은 봤을 그런 그림들로 구성했습니다.


그럼 제 주관이 듬뿍 들어간 연대별 미술과 대표작품을 뽑아보겠습니다. 

주요 작품과 함께 슬쩍 서양미술사를 볼까요 ?


#서양미술사

1. 선사미술(기원전) -  2. 고대미술 (이집트, 그리스(헬레니즘)) - 3.미술(비잔틴, 고딕) - 4.르네상스5.근대미술 (바로크,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 6.현대미술 (사실주의 - 인상주의 - 초현실 주의- 팝아트)



#1 선사미술

BC 25000~20000경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조각품이 출토 되었습니다. 

1909년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 지역의 철도공사 현장에서 여성의 모습을 조각 한 것으로 보이는 조악한 조각품이 발견 되었습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오스트리아 빈 자연사박물관>

생식기의 커다란 묘사와, 왜곡은 사실을 다뤘다기 보다는 출산을 상징하는 주술적 의미를 지닌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2. 고대미술

고대 미술은 기원전부터 - 기원 후 초기까지 미술을 의미합니다. 

이집트, 그리스, 로마시대의 미술이 이 범주에 포함됩니다.


당시는 신화의 시대였습니다. 당시의 신화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되고 전해져 왔습니다.

이집트의 경우 자신들의 전통과 신들을 벽화에 그리고 조각하며 그들의 전통과 신들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어드벤처 영화에 많이 나오는 벽화>


이집트에서 위로 올라와 유럽의 그리스와 로마시대를 살펴보겠습니다. 


"신화의 시대"

그리스 - 로마는 신화의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풍요로워 지기 시작했으며, 세상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자연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여 그들은 신을 도입하여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올림푸스의 12신>


초기 그리스 미술은 조악하고, 투박했지만. 기원전 4-5세기를 기점으로 동방의 기술들을 흡수하여 정교하고 섬세한 조각과 회화가 탄생했습니다.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정복의 영향으로 서양의 미술과 동양의 미술이 만나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미술양식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밀로의 비너스>


고대미술은 자신들의 뿌리, 전통과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다양한 작품으로 발전 되었습니다. 



#3 중세미술 

로마제국의 몰락 이후 중세는 전쟁의 시기 였습니다. 종교와 전쟁, 약탈과 정치적 혼란의 격변기를 겪는 통에 예술가들은 생존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예술은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에 의해 통제 되었으며, 그들의 밑으로 귀속되었습니다. 

모든 미술은 종교적인 의미로 해석되었으며, 오로지 하느님에 대한 찬미를 그렸습니다. 


당시 미술은 문맹자들을 위해 성경을 대신하는 수단이었기도 했습니다. 하여 사실적이고 효율적이기보다 화려하고 웅장한 그림과 건물들이 생겨났습니다. 모든 것은 경외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파리 노트르담 성당, 고딕양식의 스테인드글라스> 



#4 르네상스미술

르네상스시대 입니다.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유럽(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문화 대격변의 시기입니다. 


종교의 억압속에 쌓여가던 불만, 수도자들의 부패와 권력의 무능함에 사람들은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동로마의 멸망과 함께 예술가들은 다시 자유를 찾았습니다. 고대의 로마, 그리스의 문화를 다시 해석하기 시작하며 예술에도 다양성이 찾아왔고, 근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비너스의 탄생, 보티첼리>


중세 봉건제도의 몰락과 함께 중세시대의 막이 내려가고 있던 시기, 엄숙했던 종교는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이제 예술가들은 기독교의 신이 아닌 인간에게로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인문주의의 탄생"

중세의 몰락은 봉건제도의 붕괴, 자본주의의 발달, 페스트의 발병 등 다양하고 복합적인 이유로 시작되었습니다.


<다빈치, 모나리자>


조각과, 회화 등 모든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이 일어났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완벽한 재연을 위해 사실적이고 정교한 조각과 그림들이 탄생했습니다.



#5 근대미술

근대미술은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발생한 미술을 이야기합니다. 미술계에서는 현대미술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산업혁명과 제국주의가 널리 퍼지던 시점이고, 근대의 사고방식이 퍼지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이시대의 미술은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시대의 사고관념을 그림에 넣었던 작품들이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고전주의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낭만주의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신고전주의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품들을 이야기 합니다.

특징으로는 연극의 한장면 처럼 일정한 장소, 적은 등장인물, 건축적 배경이 주를 이뤘습니다.


<자끄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



낭만주의는

개성없는 일관성있는 그림을 추구하는 신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작가의 감정을 그림에 담기 시작합니다. 독일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이성과 합리, 절대적인것에 대한 반발로 탄생하고 발전하였습니다.


그림에서도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납니다.


<프리드리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1818>



#6 현대미술

과학기술의 발달 만큼이나 빠른 변화와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현대미술입니다.

사실주의를 시작으로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의 미술을 통틀어 이야기 합니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다양하게 기록되고 빠르게 변화하며 ㅇㅇ주의 라는 카테고리가 가장 많습니다.


사실주의 - 인상주의 - 초현실주의 - 팝아트 - 뉴미디어아트, 극사실주의 로 연결되는 계보에는 동시에 발생한 것도 있으며, 유행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정보의 교류가 쉬워진 요즘은 무엇이 주류다. 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급변하고 있습니다. 


이 현대미술 부분은 앞으로 포스팅 콘텐츠의 주를 이룰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대표작들만 간단한게 소개해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사실주의 - 인상주의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


-초현실 주의

<르네 마그리트, 인간의 아들, 1964>


-팝아트

<앤디워홀>


-미디어아트

<반고흐의 명화를 미디어로>



지금까지 서양 미술사를 한번 쭉 둘러보았습니다. 

유익하셨을까요? 

추후 포스팅은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들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끗-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과 공감은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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