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소리 #7 우울한 어느 초 여름날의 일상

오후부터 시작된 우울함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오늘 시작은 조금 피곤했다. 창립기념일 행사라고 30분이나 일찍 출근해야 했다. 


 전날 회식자리는 11시쯤 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들어오니 U-20 국가대표 한일전의 휘슬이 울렸다. 잠깐 이강인의 발재간에 감탄하다 기절하듯 잠들었다. 


 창립기념일 행사는 중국과 일본이 분쟁중이던 지난 5년간 우리나라는 역대급 호황을 누렸지만 지금은 미중 무역전쟁으로 역대급 위기라는 이야기와 함께 우리회사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사장님의 훈시로 시작했다. 


 우수사원과, 근속자 시상을 지켜봤다. 근속자에겐 부상으로 금이 주어지는데 번쩍거리는걸 보니까 좋기도하고 부럽기도 했다. 


 5년전 역대급 호황이었다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월급에 불만이 있다. 호황은 누가 누렸는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인스타를 들락날락하고 사람들 카톡 프로필 사진을 조금 관찰하다 보니 회의가 끝났다. 간단하게 기념사진을 찍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전날 커피내기에서 진 사람이 아침 커피를 삿다. 공짜커피에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부서장도 연차로 없었고 크게 바쁜일도 없었음으로 그냥저냥 기분좋은 날이었다. 오전에는 간단하게 이미지 수정하는 작업과, 면접자들의 합격여부를 통보해주는 일, 그리고 협회와 업무조율을 해야하는 일들을 진행했다. 오전이 술술 갔다. 


 나름 창립기념이라 회사에서 점심값이 나왔다. 다들 좋아했다. 점심식대가 나오는 회사가 제법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기분은 좋았다. 제법 비싼 중국음식점에서 탕수육과 볶음밥을 먹었다. D과장님이 '최고씨는 딱 보니까 올해 연애는 못하게 생겼구만' 이라고 했다. 갑자기 훅 들어온 팩트폭력에 마음 한구석이 찡했다. 


 사무실로 돌아가 늘상하던 점심 커피내기를 했다. 최근엔 승률이 좋기 때문에 별 걱정없이 즐기면서 했다. 또 이겨서 이때까지도 괜찮았던 것 같다. 또 공짜 커피를 먹고 일을 하려고 했다. 


  업무 시작과 동시에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렸고, 기분좋게 전화를 당겨받았다. 타 부서 간부 C부장의 연락이었다.   


[사전에 공지되어 외부 행사에 지원인력을 차출해야 되는 일을 떠맡게 되었다] 


분명 사전에 공지된 일인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을 떠맡고 다른사람에게 싫은 일을 주게 되어 괜시리 부아가 치밀었다.  


 와중에 지원을 받아야 하는 일에 다른 부서에서 단 1명도 지원해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아마 이게 우울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분명 도와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1명도 지원해줄 수 없다는 이야기의 이면에는 사적인 무언가가 깔려있었다. 


 갑자기 서러워졌다.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화인지 슬픔인지를 좀 식히기 위해 잠깐 밖으로 나갔다. 비가려오려는지 습한 바람이 불었다. 습한 바람에 우울이 붙어왔다. 


 1시간을 남기고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맘에드는게 하나도 없다고 이직해야지라고 동료들에게 너스레를 떨어도 기분이 풀리진 않았다.


 칼퇴근을 하고 인도어 골프연습장에서 기분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쭉쭉 뻗어 나가는 공을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집에서 부산을 떨며 연습장으로 갔다. 날씨는 기분 나쁠 정도로 좋았다. 3월의 봄날씨가 떠올랐다. 



채를 잡고 휘둘렀다. 습한 공기에 땀이 금방 났다. 볼은 생각보다 맞질 않았다. 또 짜증이 났다. 나는 70분동안 250개의 공을 날렸는데, 17초당 볼 하나씩 날린 격이다. 쉬지않고 힘이 가득 찬 상태로 휘둘러서 손에 물집이 잡혔다. 골프치던 2년간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땀을 좀 뺏더니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집에 돌아오는 길 시계를 보았다. 오늘 하루가 너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간 거 같았다. 우울해 할 시간이 없다. 는 생각이 들었다.

 

D과장님의  '최고씨는 딱 보니까 올해 연애는 못하게 생겼구만' 라는 말이 귀에 멤돌았다. 그의 정확한 분석에 내 처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지겨웠다. 



 집에 돌아와 요즘 연습중인 펜글씨 연습을 했다. 송광사에서 발견한 원감국사의 시를 적었다. 아직 내안에 평안은 없는듯 하지만 기분이 좀 나아졌다. 


30대 중반이다.

우울을 즐길 나이가 아니다.


끗-